1.이해력이 좋고, 기도에 훈련이 되어 있고, 스스로 자기를 가다듬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훌륭한 분들의 저서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내 말에서 기도에 대한 것을 배우려고 든다면 틀렸다고 볼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그 책들이란 주님의 생애와 수난, 심판과 지옥, 인생의 허무,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본분을 일 주일 동안 날마다 묵상할 수 있게 엮어놓은 것으로, 교리내용도 훌륭하거니와 기도의 시작과 끝을 위해서도 잘 짜여진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기도할 수 있고, 벌써 습관이 되어버린 사람에게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께서 그를 좋은 길로 인도하시어 광명의 포구에 다다르게 하실 것이요. 시작이 좋으니 끝도 좋아서 그 길로 가면 누구나가 안식과 안정을 얻을 것입니다. 외곣으로 자리잡힌 오성은 안식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의 도욱심을 얻어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고, 어떤 방법을 가르쳐주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즉, 오성이 안정되지 못하여 고민하는 영혼들이 많으니 여러분의 영혼도 혹시 그와 같거든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말하자면, 어떤 영혼은 어찌나 산만한지 재갈 물리지 않은 말처럼 멈출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리갔다 저리 갔다 하면서 한번 쉬는 법이 없습니다. 타고난 성질이 그러한지 하느님이 막지 않으셔서 그런 건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생각하면 그들이 얼마나 불쌍하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타는 듯, 목이 마르면서도 아주 멀리서 물을 보고만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물 있는 데를 가려 해도 처음부터 끝까지 가는 길을 막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힘을 내서 가까스로 첫번 째 원수를 물리쳤는가 하면, 두번 째 원수한ㅌ 그만 지고맙니다. 그럴 때면 그렇게도 힘드는 물을 마시기보다는 차라리 목이 타서 죽어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치 힘이 다하고 용기마저 없어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두번 째 원수까지 이겼다가 세번 째 가서는 기진맥진해버립니다. 두 걸음만 더 가도 주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생수(요한 4.13참조)를 마시고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될 것을~~~
진리 자체이신 주님 입에서 흘러나온 그 말씀은 얼마나 옳고 참다우십니까? 영혼은 이승의 것을 다시는 목말라 하지 않고 오직 저승의 것에만 더욱 목이 타오를 것입니다. 그 갈증은 이승에서 겪는 목마름에 비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갈증은 이승에서 겪는 목마름에 비길 수 없는 그런 것입니다. 영혼은 이 갈증을 체험하고자 얼마나 목말라 하는지! 영혼은 스스로의 가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비록 그 갈증이 못 견디게 괴롭기는하나 갈증 자체가 후련한 맛을 자아내므로 다른 갈증이 가셔지게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승의 것에 대한 갈증을 식히면서 영혼을 후련하게 만드는 갈증을 하느님께서 풀어 주실 때, 영혼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은헤의 하나는 아쉬움을 남기시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이 물을 마실수록 항상 더 마시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3.물은 세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그 밖에도 여러가지가 더 있겠지마는 이 자리에서는 문득 떠오르는 것을 말할 뿐입니다. 첫 째는, 무엇을 식히는 특성으로, 덥다가도 물을 가까이하면 서늘해 집니다. 큰 불도 물로 끕니다. 그러나 역청이 불을 만나는 경우에는 오히려 더 잘 탑니다. 주여,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세찬 불길은 물을 부어도 계속 타오르기만 하니 말입니다. 무섭게 뜨거운 불은 상극인 물조차 멈추게 하기는커녕 성하게 해줄 따름입니다. 이런 문제는 철학을 아는 분과 이야기 했으면 오죽 좋겠습니까? 그는 물질의 성질을 알고 있으므로 나한테 가르쳐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 문제에 퍽 흥미를 느끼면서도 어떻다 말할 줄도 모르고, 이해조차 못하겠습니다.
4.자매들이여, 여러분은 생명수를 지금 마시고 있지만, 주께서 이 물을 마시어주실 때마다 그 맛을 알게 되고, 아울러 주님의 사랑이 정말 세차고 보면 영혼이 어떻게 이승의 것을 온통 벗어나서 훨씬 그 위로 나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야말로 우주와 그 모든 요소를 지배하시므로, 그리고 물이 땅에서 솟아나므로 물이 하느님의 사랑을 식혀버릴까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물은 그런 힘이 없을 뿐드러 물과 불이 상극이라도 절대자이신 하느님이 이에 속하실리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자매들이여, 내가 이 책에서 마음의 자유를 가지도록 힘쓰라고 다짐해둔 말을 이상히 여기지 마십시오. 성요셉 수도원의 가난뱅이 수녀가 온 땅을 지배하고 모든 자연의 요소를 지배하게 된다니 근사한 일이 아닙니까? 마르티노 성인께는 불과 물이 복종했고, 프란치스코 성인들께는 물고기와 새들이 복종했습니다. 그분들이 이 세상 모든 것을 지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세상을 가벼이 여기는 데에 온 힘을 다하였고, 있는 힘을 다하여 세상을 주재하시는 분께 온 기를 예속시켰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땅에서 솟아나는 물은 불앞에 힘이 없습니다. 사랑의 불꽃이 너무나 높아 낮은 물체에서부터 생겨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불꽃이기는 하지만 아주 작은 것이 있습니다. 원래 불꽃은 하찮은 것에도 꺼져버리지만, 이 불꽃만큼은 그렇지 않습니다. 유혹이 온통 바다와같이 몰려올지라도 이 불꽃이 타오르지 못하게 막지는 못하고 오히려 이것은 유혹을 지배하고 말 것입니다.
5.하늘에서 비처럼 내리는 물도 이 불을 꺼뜨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 경우 물과 불은 상극이 아니라 같은 근원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한 원소가 딴 원소와 상극이 될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서로 도와서 하나의 결과를 내게 됩니다. 보십시오. 참다운 기도에서 오는 참다운 눈물, 그것은 하늘의 임금님이 내리시는 것입니다. 이 물은 불을 도와서 더 오래 타오르게 하고, 또 불은 물을 도와서 서늘함을 더해줍니다. 주여, 이 얼마나 아름답고 영묘한 일입니까! 불이 서늘하다니! 그렇습니다. 이 불이 하늘의 생명수와 합치는 날에는 이 세상 모든 정열을 다 식혀버립니다. 하늘이야말로 눈물이 솟아나는 샘이며, 눈물은 주께서 내리신 것이지 우리 힘으로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확실히 이 물은 우리가 이 세상 어느 것에도 정을 붙이지 못하도록 열을 식게 해주고, 참다운 사랑의 불길만을 도와서 더 타게 할 뿐이니, 불이란 그 성질이 좁은 데는 마음이 차지 않아서 가능하면 온 세상이라도 살라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6.물의 다른 특징은 더러운 것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씻을 물이 없었던들 세상은 어찌 되었겠습니까? 이 생명의 물, 하늘나라 물, 맑은 이 물이 흐리지 않고 진흙에 묻지 않고 하늘에서 내려올 때 그 얼마나 깨끗한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한 번만 마셔도 영혼이 온갖 허물을 씻어서 맑아진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내가 이미 서술한 바와 같이(자서전 19장 참조) 하느님은 이 완전한 관상의 생명수를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마시어주시지는 않습니다. 초자연적이고 신비스러운 일치이기도 한 이 물은, 우리 죄로 말미암은 비참과 진흙을 깨끗이 씻어버리도록 하느님이 영혼에게 내리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오성을 통하여 오는 묵상의 맛도 있기는 합니다.만, 아무리 그 맛이 대단하다 해도 직접 샘구멍에 대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결국 땅바닥에 흐르는 물을 마시는 것이므로, 이 길로 가다가는 언제나 몸을 더럽힐 진흙 같은 것이 없지 아니하여 한 점 티 없이 새말갛게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 나름대로 알아듣도록 표현한다면, 오성으로 추리하면서 하는 이 기도를 나는 생수라 부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진 애를 써도 무엇인지도 모를 싫은 것이 영혼에 항상 달라붙어 있고, 게다가 그것은 우리의 육체와 나쁜 경향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7.좀더 풀어서 말해볼까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무엇이냐, 일체는 어떻게 끝나느냐하고 묵상을 합니다. 초탈을 배우자는 일인데도 거의 깨달음을 얻지 못한 채, 우리는 어느덧 우리가 정붙이고 있는 무엇에 생각을 잠그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 생각을 쫒으려고 애쓰지마는, 그게 어떻게 되었나, 어떻게 될까, 나는 어떻게 했지, 무얼 해야 되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헷갈리게 됩니다. 이와같이 모처럼 초탈을 하고자 하는 생각이 오히려 우리를 위험에 몰아넣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이런 경우 묵상을 그만 두어야 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헷갈리는 마음을 두려워하고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관상의 기도는 이와 달라서 이런 조심을 하는 것은 바로 주님으로서 그분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전혀 믿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이 은혜를 주시려 하는 동안만큼은 우리 영혼을 헤칠 만한 것을 치워주시고 우리 영혼을 바로 당신 곁에 두시어 일순간에 많은 진리를 보여주시며 이승에서는 몇몇 해를 결쳐서도 알아들을 수 없는 모든 지식을 환히 깨치게 해주십니다. 우리의 시력은 본디 약하고 길가의 먼지에도 눈이 멀지마는, 이 관상기도는 주께서 우리이 하룻길을 끝까지, 그것도 어떻게 하시는지 우리가 전혀 모르는 채 데려다 주시는 것입니다.
8.물의 또 한가지 특성은 목마름을 가시게 하고 후련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목마름이란 매우 아쉬운 무엇, 주께 아쉬운 무엇을 애타게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무엇이 아주 없어도 우리는 죽고, 너무 있어도 생명이 끊어지는 것이니 물에 빠져 죽는 이의 경우가 이렇습니다.
주여, 내가 이 생수에 풍덩 빠져 죽었으면 오죽 좋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겠습니까?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을 애타게 바라는 바람이 자꾸 커져서 마침내 인간 본성이 견디다 못해 죽어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성녀 자신을 가리킴, 그의 자서전 20장 참조) 이 생수를 어찌나 벅차게 받았던지 하느님이 재빨리 구해주시지 않았던들 하마터면 탈혼과 함께 자신을 뛰쳐나갈 뻔 하였습니다. '자신을 뛰쳐나갈 뻔하였다' 이 말은 그만큼 이 경지에 도달하면 영혼이 안식상태에 있다는 뜻입니다. 즉, 이 물에 빠져든 영혼은 세상이 질식할 것만 같아 하느님 안에서 살게된다는 것이니, 그때 하느님이 영혼으로 하여금 그 맛을 누리도록 복돋워지시기에 망정이지 그냥 버려두면 목숨이 끊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9.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최고 선이신 하느님께는 완전치 않은 것이 있을 수 없으며 당신이 내리시는 것은 모두가 우리의 행복을 위함이며, 생수를 아무리 벅차게 내리신다 해도 지나치게 주실 리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많이 내리실 적이면 방금 말한 바와같이 많이 마신 만큼 영혼의 힘을 복돋우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유리 장인이 담을 물건의 양에 맞게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생수를 우리 스스로 담으려 하면 우리가 하는 일이므로 항상 잘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슨 좋은 것이 담겨진다면 주께로부터 오는 것이라 좋은 법인데, 우리는 어찌나 지각이 없는지 이 목마른 고통은 맛스럽고 흐뭇하기 때문에 언제나 더 양냥거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한정 마시려 하고, 그럴수록 갈증은 더욱 심해져 때로는 죽는 수가 있습니다. 그런 죽음이야 행복하겠지만 더 살았으면 다른 사람들도 이런 죽음을 애타게 바란 나머지 죽도록 도와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내 짐작에는 아마도 악마가 이렇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이 살아 있을수록 자기한테는 해가 돌아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악마는 무작정 고행을 하도록 유혹해서 그 사람의 건강을 망치게 할 것입니다. 이것은 악마에게 작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0.잘 알아두십시오. 이런 맹렬한 갈증을 가진 사람은 이 유혹에 떨어질까 조심하여야 합니다. 갈증으로 죽지는 않는다 해도 건강이 상하게 되고, 자기는 원치 않는다 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니, 이것은 무슨 수를 써서든지 피애햐 될 일입니다. 더러는 우리가 힘쓴 보람이 있어도 다는 숨기지 못할 것이니, 갈증이 심하게 맹렬히 타오를 경우에는 특히 조심하여서 섶을 더하기는 커녕 생각을 딴 데로 돌리면서 다치지 않게 끊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때로 우리의 사랑 못지않게 거센 감정을 일으키는 수가 있습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무엇이건 - 나쁜 것이라도 - 무서운 정열을 가지고 갈망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이탈이 썩 어려우리라고 나는 믿습니다.
억제야말로 매사에 가장 유익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듯 좋은 갈망을 억제한다는 것이 바보짓같이 보일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 말은 아주 없에라는 것이 아니라 억제하나는 것으로서 이렇게 함으로써 공로가 될 다른 갈망을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11.우선 나부터 잘 알아들어야 하겠으니 좀더 말해볼까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 옥살이를 벗어나서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갈망이 있다 합시다. 성바올로가 지니시던 그런 갈망 말입니다. 이런 갈망은 한시름을 자아내면서도 그 자체가 아주 맛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을 억제하기에는 적지 않은 극기가 필요할 것이고 더구나 말끔히 없에버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갈망이 심하면 정신이 나갈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리 오래 되지 않지만 나는 그런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천성이 과격했지만 자기의 의지를 잘 꺽는 것같이 보였습니다. - 다른 기회에 내가 본 바로는 벌써 자기 뜻을 죽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갈망의 고통이 하도 심해서 이것을 감추려 애쓰다가 한동안 바보같이 된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이 경우에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이와같이 막다른 골목에서는 그 갈망이 비록 하느님 성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일지라도 두려워할 줄 아는 겸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렇듯 막다른 궁지에까지 우리를 몰아넣을 만큼 그만한 사랑을 우리가 가졌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12.내 생각으로는 이 갈망을 딴 생각으로 바꾸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즉, 더 오래 살아서 하느님을 섬기고, 자칫하면 영영 버리게 될 영혼에게 빛을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섬기는 생활을 더해감에 따라 그는 하느님을 더 많이 누릴 공로를 세우면서 오히려 섬김이 모자랐음을 두려워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그 무서운 시련 중에서도 좋은 위로가 되어 아픈 것은 가라앉고 얻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주님만을 섬기기 위하여 아픔을 참으면서도 이 세상에서 살려고 애쓰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모진 고생, 쓰라린 고통을 겪는 사람을 위로해주려고 "참으시오, 모든 것을 하느님 수중에다 맡기고 그분 뜻대로만 사시오"하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13.위에서 말한 갈망은 때로는 악마가 자아낼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럴 수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카시아누스의 이야기에 어떤 은수자가 나옵니다. 그는 무서운 고행을 하면서 살아왔는데, 악마가 그를 꾀어 하느님이 일찌감치 보고 싶거든 우물 속으로 뛰어 내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뛰어 내린 그 은수자가 하느님을 제대로 섬겼거나 겸손으로 셤겼다고 행각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진실한 분이신데, 그렇듯 뻔한 일에 사람이 소경이 되게 내버려두실 리가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분면한 사실은, 갈망이 하느님께로부터 올 때, 그것은 사람을 나쁘게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빛과 중용과 분별을 준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원수인 악마는 무엇을 하든지간에 해치는 것을 노리므로 악마가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매사에 있어 중요합니다. 이를테면, 몸의 힘이 다하고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낄 경우, 아무리 재미나는 기도라도 그 시간을 줄여야 합니다. 무엇에 있어서든지 가장 소중한 것은 분별입니다.
14.사랑하는 따님들이여, 내가 왜 싸움에 대한 말을 하기에 앞서 싸움 끝에 있을 상급부터 이야기하는지 아십니까? 하늘 나라 샘에서 생명수를 마시는 행복을 왜 미리 말하는지 아십니까? 나그네 길에서 만나는 귀찮고 고생스러운 것에 대해서는 슬퍼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지치지 말라고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위에서도 말했습니다마는, 여러분이 몸만 굽히면 생수를 마실 수 있는 데까지 다다랐다가도 모든 것을 집어치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거기까지 닿을 힘이 없다는 둥,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둥 하는 생각으로 그 좋은 것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15.보십시오. 주님은 모든 사람을 부르고 계십니다. 당신은 진리 자체이시므로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공번된 잔치가 아니라면 주님께서 우리를 다 부르시지 않을 것이요, 부르시더라도 "너희에게 마실 것을 주리라."(요한 7.37)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대신 "모두들 오너라, 손해는 없으리라.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는 마실 것을 주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조건이 없이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모든 사람을 다 부르시는 것이니, 누구든지 가다가 멈추지 않는 한, 생명수를 얻지 못랄 리가 없다는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주께서 당신 자비로 은혜를 내리시어 이미 허락하신 바를 우리가 올바로 찾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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