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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자료집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그 역동의 시간들 "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가르침

 

 

제2차 바티칸공의회, 그 역동의 시간들
1962년 10월 개막해 1965년 12월 폐막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급변하는 현대 세계 안에서 교회의 쇄신을 목표로 열린 위대한 역사의 시간이었다.
“교회 변해야 한다” 목표로 열린 위대한 사건

전문-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급변하는 현대 세계 안에서 교회의 쇄신을 목표로 열린 위대한 역사의 시간이었다. 이단에 대한 대응으로 열렸던 이전의 공의회들과는 달리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의 현대화를 겨냥하고 교회의 모든 영역에서의 이른바 「아죠르나멘토」(aggiornamento.교회의 현대화운동)를 모색한 공의회였다. 이 공의회는 급변하는 현대 세계의 조류에 발맞춰, 교회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드러낸 사건이었고, 그 역동적인 힘은 폐막 40주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보편교회와 지역교회의 사목과 복음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준비부터 폐막까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역동적인 순간들을 되돌아본다.


1965년 12월 8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 광장의 정면에 마련된 특별 제대에는 교황 바오로 6세가 지난 4년 동안의 노고를 마무리하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폐막식을 거행하도록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 자리에는 전세계 80여개국 정부의 특사들과 다른 종파에서 파견된 대표단들이 함께 참석해 있었다.

교회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

마침내, 바오로 6세 교황이 2500여명에 달하는 전세계 주교들이 장엄하게 행렬을 이뤄 도착했을 때, 베드로 광장에 운집한 수십 만명의 신자들은 일제히 환호를 올리며, 우렁찬 성가로 폐회식장을 감격의 도가니로 몰아갔다.

교황은 폐막식에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그야말로 가톨릭교회 뿐만 아니라, 전 인류와 세계를 새로운 성령강림으로 혁신하기 위한 것이라고 천명하고, 21번째로 열린 이 공의회는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교황은 이어 교회일치의 노력을 다시 한 번 다짐하면서, 하루 전인 7일, 동방정교회와 900년간의 불목을 씻고 다시금 형제애 속에서 포옹하였음을 상기시켜, 이같은 일치와 친교의 기운이 모든 그리스도교 교회 간에도 미칠 것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교황은 나아가 현대 세계와의 대화를 토대로 한 교회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 및 평화의 인류와 세계 건설에 선의의 모든 사람들과 민족들이 힘을 합칠 것을 호소했다.

장엄한 떼 데움(Te Deum, 감사가)으로 폐막식을 마쳤을 때, 성 베드로 대성당 전면에 걸려 있는 거대한 시계는 오후 1시25분, 한국 시간으로 저녁 9시2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은 근현대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2천년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공의회가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공의회는, 바오로 6세 교황이 분명하게 말했듯이, 『공의회가 목적한 것의 실현은 이제부터』였다.

그래서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헤어져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조금 뒤에 여러분은 공의회를 떠나 사람들에게 가서, 우리가 4년 전부터 함께 추구해 온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의 쇄신 그 기쁜 소식을 전할 것입니다. …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바로 지금 평화의 첫인사를 하여야 합니다. 공의회는 해산에 앞서 이 예언자적 임무를 완수하고자 하며, 이 짧은 메시지에서 세상을 위한 「기쁜 소식」을 모든 사람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옮기고자 합니다. 이제 가장 권위 있는 공의회의 대변인들이 그 기쁜 소식을 여러분의 이름으로 온 인류에게 전할 것입니다』(교황 바오로 6세, 제2차 바티칸공의회 폐막 메시지 중에서).

공의회의 소집, 성령의 영감

공의회가 개막된 것은 1962년 10월 11일이었지만, 교황 요한 23세가 가슴에 품고 있던 공의회 개최의 뜻을 꺼낸 것은 1959년이었다.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기도 주간의 마지막날인 1월 25일 요한 23세 교황은 성 바오로 대성전에서 미사를 봉헌한 뒤, 베네딕도회 성 바오로 수도원을 방문해 17명의 추기경들을 만난 자리에서 공의회를 소집할 생각을 밝혔다.

이것은 미리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훗날 그가 고백했듯이, 갑작스럽게 마음에 떠올라 이뤄진 공의회 소집은 그래서 초자연적인 영감이었고, 성령의 인도하심이었다. 따라서 이 선언은 교회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감명과 놀라움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많은 사람들은 『왜 지금 공의회를?』 하고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대개 공의회는 의견의 차이가 생기고, 이단이 생길 때마다 열렸다. 교회는 공의회를 통해 오류를 배척하고 이단을 단죄했다. 그리하여 그 후 만사가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갔던 것이다.

공의회가 이교와 이단의 단죄 수단이었음은 교회사를 통해 잘 드러난다.

역사상 최초의 공의회인 니체아 공의회(325년)는 아리우스파를 단죄했고, 에페소 공의회(431)는 네스토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선언했다. 그 후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이단이 일어나 신앙에서의 이탈을 다루기 위해 많은 공의회가 개최됐다.

가장 가까이, 종교개혁 이후 트리엔트 공의회(1542∼1563)는 프로테스탄티즘을 단죄해 논쟁을 종결하고 일치를 회복했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측이 이 공의회를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교회는 분열됐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1869∼1870)는 비록 주교들의 지위 등 여러 문제를 미해결로 남겼지만, 교황의 무류성을 분명히 했다.

공의회 개최, 백여년의 기다림

그렇기 때문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 소집 당시 교회 상황 안에서 굳이 공의회를 소집할 까닭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의회가 아닌 통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지 못할 문제들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전례 개혁이 이미 추진되고 있었고, 동방교회와 개신교와의 일치를 위한 접촉이 이미 80여년 전에 시작됐다. 불교, 회교, 힌두교 등 타종교와의 교류와 연구도 이미 20∼30년 전에 본격화됐다.

하지만 실상은 이전 100여년간의 교회 역사를 살펴볼 때, 이미 교회의 변화를 촉구하는 세상의 변화가 감지되고 있었다.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세상은 변하고 있다. 교회도 변해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후임 레오 13세 교황은 세상에 대한 관심을 두드러지게 표시했고, 이후 교회 안에서는 회칙들을 통해서 사회 문제에 대한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들이 잇달아 천명됐다.

아울러 교회는 근대과학과 기술의 발달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온 세계의 변화에 주의를 기울였다. 특히 세상은 그리스도교 집단들로만 구성돼 있지 않으며, 비그리스도교의 세계 안에서도 귀중한 요소들이 포함돼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제 교회는 세상의 변화로 촉발된 교회 자체와 세계 속의 교회의 사명에 대한 성찰을 요청받고 있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이처럼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교회 역시 변화돼야 한다는 깨달음의 소산이었고, 요한 23세가 공의회의 소명으로 제시한 「교회의 현대화」로서 아죠르나멘토(aggiornamento.교회의 현대화운동)를 공의회의 주제로 표명하게 된 것이다.

■“교회 주체는 평신도이다”

보수와 진보, 그 갈등과 대립

어떻든, 사람들은 돌연한 공의회 소집에 의아해하고 당황했다. 특히 교황청의 추기경들의 당혹감은 큰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당혹감은 공의회 소집이 갑작스럽게 이뤄졌다는 것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공의회가 교회 안에 격동을 불러올 것임을 예견한 때문이었다.

요한 23세에 이어, 공의회를 마무리한 바오로 6세 교황은 훗날 이러한 우려를 증명해주는 많은 발언을 했다.

바오로 6세는 『공의회는 길을 열고, 씨를 뿌리고, 축(좌표)을 주었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듯이 공의회에 잇달은 시대는 무기력과 혼란의 시대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공의회 얼마 후 미사 참례자의 수가 격감했고, 성소를 포기하는 성직자와 수도자가 속출했다. 공의회의 비판자들에게 이는 커다란 빌미가 됐다. 이들은 과도한 민주화로 교황과 주교의 권위가 약화됐고, 교회의 세계에 대한 영향력이 상실됐다고 주장했다.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격화됨으로써 교회가 분열되고, 공의회가 주장한 종교 자유, 종교간 대화, 일치 운동은 종교 무분별주의를 양산한다고 비난했다.

공의회의 진보파들은 요한 23세의 아죠르나멘토를 구현하기 위한 내적 동요는 필수적인 것으로서, 모국어 사용은 신자들의 전례 참여를 촉진했고, 「하느님 백성」의 교리는 평신도의 교회 참여를 이끌며, 교회 일치의 자세는 교파간의 다툼을 진정시키고, 종교의 자유와 종교간 대화는 관용의 자세를 제시하고 토착화를 고무함으로써 결코 선교를 저해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교회를 분열과 불확실성으로 몰아넣는 듯이 보였지만 실제로 공의회는 신성한 경쟁과 희망으로 가득했고, 전통과 진보의 화해가 이뤄졌으며, 급변하는 세계 안에서 교회의 위상을 회복하도록 했고, 격렬한 대립과 긴장은 공의회와 교회의 자유를 오히려 증명하는 것이었다.

보수와 진보 격돌, 역설적 승리

아무튼 공의회가 내보인 긴장과 갈등의 관계는 이미 공의회의 첫 회기에 분명하게 드러났다.

공의회 소집을 처음 밝힌 뒤, 일련의 준비기간을 거쳐 첫 회기가 열린 것이 거의 4년이 지난 1962년 10월 11일이었다. 이때 공의회에 참석할 수 있는 교부들은 모두 2908명이었다. 하지만 공산권 교회에서는 참석이 제한됨에 따라, 총 2540명만 참석할 수 있었다.

교황 요한 23세는 개막연설에서, 보수적이고 방어적인 고위 성직자들을 겨냥해 「불운의 예언자」로 불렀다. 현대 사회를 부정적으로만 간주하려는 정신 자세가 공의회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경고로 보였다.

이어진 첫 총회는 20분만에 끝났다. 교황청이 제출한 10개 위원회의 위원 명단에 대해 교부들은 쉽게 동의하지 않았고, 선거는 연기됐다. 이후 지역별 주교회의에서 후보자 명단이 작성됐다.

전례에 관한 문헌이 토론된 10월 22일 제4차 총회에서는 대표적인 보수파 추기경이 공의회의 혁명적 경향을 비판하면서 발언 시간을 초과하자 사회자가 마이크의 스위치를 끄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전례에 관한 문헌, 신앙의 원천으로서 성서와 성전의 명백한 구별, 교회에 관한 안건 등 건마다 보수파와 진보파의 격돌이 이어졌고, 결국 12월 8일까지 계속된 제1회기에서는 단 하나의 문헌도 채택되지 않았다.

논의의 양만으로 본다면, 1회기의 성과는 놀라울 정도이다. 2개월이 채 안되는 기간 동안 500명 이상의 교부들이 발언했고, 500명 이상의 교부들이 4개의 새로운 수정안을 서면으로 제출했다.

하지만 1회기의 진정한 성과는 다른데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단 한권의 문헌도 승인되지 않은 것이 오히려 1회기의 위대한 성과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교단이 그 존재를 분명히 했다는 것이다. 전세계에서 온 주교단은 한명 한명이 보편교회의 일원으로서, 성 베드로 대성당을 「마치 거대한 압력솥」처럼 만들었고, 중복되고 만발한 대화와 주장들의 교류를 통해서 스스로 변화되어갔다는 것이다.

교황 요한 23세의 사망

1963년 6월 3일, 교황 요한 23세의 사망으로 공의회는 중단됐다. 그러나 곧이어 교회 역사상 가장 짧은 추기경 회의에서 교황으로 선출된 몬티니 추기경이 바오로 6세 교황으로서 공의회를 이끌고 가게 됐다. 새 교황은 전적으로 전임 교황이 시작한 공의회를 같은 정신으로 계승할 것임을 취임 연설에서 선언했다.

교황의 이러한 취지는 개회사에서부터 드러났다. 교황은 과거 교회 분열의 책임이 가톨릭 교회에도 있으니 용서해달라는 취지의 연설을 해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왔다. 교황은 또 『세계를 향해 넓게 열린 공의회의 창문을 통해』 다른 종교들을 바라보면서 『그들 종교 안에 포함돼 있는 진리와 미덕과 인간성을 높이 평가』했다.

9월 29일부터 12월 4일까지 열린 제2회기에서 바오로 6세 교황은 개회식에서 공의회의 목적을 네 가지로 지적했다. 즉 교회의 자각과 그 본성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교회 안의 쇄신을 도모하며, 그리스도교계의 일치를 추진하고 현대인과의 대화를 증진하는 것이다.

2회기에서도 격론이 있었다. 마리아의 교회 안에서의 위상과 주교단에 대한 교리를 다루는 과정에서 보수파와 진보파의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고, 특히 진보파는 주교단에 대한 교리를 다루는 과정에서 교황청이 신학자를 다루는 태도를 신랄하게 비난하면서 개혁을 요구했다. 주로 위원회 활동을 중심으로 이뤄진 제2회기에서는 「전례 헌장」과 「매스미디어에 관한 교령」이 승인, 반포됐다.

풍성한 결실들

제3회기는 1964년 9월 14일부터 11월 21일까지 열렸다. 원래 이 회기에서는 대부분의 문헌들이 결정, 마무리 단계가 될 것으로 예상됐으나 실제로 승인된 문헌은 「교회 헌장」, 「일치 교령」, 그리고 「동방교회에 관한 교령」 등 세 가지 뿐이었고 나머지는 4회기로 미뤄졌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전 회기에 승인된 「전례 헌장」에 바탕을 둔 새로운 전례에 따라 5대륙을 상징하는 24명의 주교들과 함께 개막식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1965년 9월 14일부터 12월 8일까지 열린 제4회기는 풍성한 결실을 거둔 마지막 회기였다. 교황은 공의회의 마지막 단계인 4회기가 하느님과 교회, 인류에 대한 삼중의 사랑으로 특징지워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교황은 교부들의 노고에 감사하고, 「세계 주교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를 설립할 것이며, 유엔 창립 20주년을 맞아 유엔 본부를 방문해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할 계획을 밝혔다.

이 최종 회기에서는 먼저 종교 자유에 관한 개정의안에서 시작해, 교회의 선교활동, 주교의 사목적 직무, 혼인과 산아 제한에 대해 검토됐고 그 외에 무신론, 공산주의, 전쟁, 핵무기 등 현대의 여러 문제들이 논의됐다.

교황은 특히 일부 교부들이 성직자의 독신제도를 토의하자는 움직임에 대해, 이는 교회 전통 뿐만 아니라, 현대 세계에서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기에 공개 토론은 바람직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에 대한 규율이 강화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4회기에서는 마지막 회기라는 기회에 걸맞게, 10월 28일, 11월 18일, 그리고 12월 7일 세 차례의 공개 회의에서 모두 11개의 헌장과 교령, 선언들이 반포됨으로써, 1~3 회기까지 승인된 5개의 문헌과 함께 모두 16개의 문헌들이 공의회 성과로 집약됐다.

교황은 이어 이듬해 1월 1일부터 5월 29일까지를 특별 성년으로 반포했고, 마침내 1965년 12월 8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폐회식을 거행하고 공의회가 끝났음을 장엄하게 선포했다. 그리고 교회는 바야흐로 한 시대를 마치고 새로운 시대를 향한 먼 항해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