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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지종(베르나르도) 신부님 글

~ 믿음, 함께 있다는 느낌 / 상지종(베르나르도) 신부님 ~

<믿음, 함께 있다는 느낌>

 



2014, 8, 9 연중 제18주간 토요일
(평화방송 라디오 오늘의 강론)

마태오 17,14ㄴ-20 (어떤 아이에게서 마귀를 내쫓으시다)

그때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주님,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간질병에 걸려 몹시 고생하고 있습니다. 자주 불 속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또 자주 물속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이리 데려오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런 다음 예수님께서 호통을 치시자 아이에게서 마귀가 나갔다. 바
...로 그 시간에 아이가 나았다.

그때에 제자들이 따로 예수님께 다가와,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믿음, 함께 있다는 느낌>

한 아버지가 간질병에 걸린 아들을 고치기 위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을 찾아갔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그 때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들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물론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얼마 후 다시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하는 아버지의 말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실망과 불신이 느껴집니다. 이 아버지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한 마음 한 몸인 갈림 없는 하나의 공동체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모든 권한을 건네받아 예수님을 대신하여 가르치고 행동하는 제자들에 대한 불신은, 곧 예수님에 대한 불신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그런데 실망하기로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이요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는 동안 한껏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려 했지만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로부터 모든 권한을 받았는데, 간질병 하나 고치지 못하다니 이게 무슨 망신인가?’ 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낙담한 제자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것도 창피한 마음에 아무도 없는 때와 장소를 택해서 따로 예수님께 다가가서 말입니다.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여전히 제자들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계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과연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왜 너희는 나의 능력으로, 나의 이름으로 치유하려 하지 않았느냐?” “왜 너희는 너희의 능력을 과시하려 했느냐?”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는 것을, 너희에게 힘이 되어준다는 것을 믿기가 그렇게 힘이 드느냐?” 바로 이러한 뜻이 아닐까요?

결국 간질병을 앓고 있던 아들을 둔 아버지에게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을 찾는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들 모두에게 예수님께서는 바로 믿음의 힘을 가르쳐주십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언제 어디에서도 함께 있다.’는 느낌이 바로 믿음이 아닐까요? 세월호 참사로 아이를 가슴에 묻은 부모님들은 비록 생사를 달리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아이들이 자신들과 함께 있음을 강하게 느낌으로써 고통스런 나날을 이겨내고 있다고 합니다. 세월호 가족들처럼, 누군가 비록 몸은 떨어져 있기에,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으며, 이야기 나눌 수도 없다 하더라도, 항상 든든한 버팀목으로 자신 안에 자리 잡고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완전히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믿는다.’라고 할 때 거기에는 어떠한 조건도 있지 않습니다. 내가 너를 있는 그대로 대할 뿐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가지 조건을 내걸고, 그 조건이 채워진다면 믿겠다고 말하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께 대한 믿음을 빙자하여 오히려 예수님을 자신의 종으로 만드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무수한 조건을 내걸고 예수님을 대할 때, 예수님께서 함께 하실 자리는 없습니다. 참된 믿음은 아무 조건 없이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우리를 예수님께 내어놓는 것입니다. 바로 이 믿음만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이루는 우리의 참된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