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27일 수요일 묵상과 기도
<성무일도> 욥 1,21; 2,10b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주께서 주셨던 것, 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지라.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는데 나쁜 것이라고 하여 어찌 거절할 수 있단 말이오?
응송
◎ 내 주여, 당신 계명에로 * 내 마음 기울게 하소서.
○ 당신의 도로 나에게 생명을 주옵소서.
<청원기도>
말씀과 성체의 식탁에 초대받은 교회에 생명을 주시고,
― 이 음식의 힘으로 기꺼이 주님을 따를 수 있게 하소서.
◎ 주여, 당신의 교회를 굽어보소서.
<오늘의 복음 말씀> 마르 4,13-20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모든 비유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씨 뿌리는 사람은 실상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말씀이 길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이 말씀을 들으면 곧바로 사탄이 와서 그들 안에 뿌려진 말씀을 앗아 가 버린다. 그리고 말씀이 돌밭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말씀이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영적 독서> 내적 침묵으로 향하는 길, 에디트 슈타인, 이연행 옮김
2. 아주 단순한 작은 진리
내가 말하려는 것은 사실 아주 단순하고 작은 진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손안에서 살기 시작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내게 오는 것은 취합니다. 그리고 다만 모든 것을 잘 해내기 위해서 거기에 필요한 힘이 내게 주어지기를 요구할 뿐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한결같이 남아 있는 친구처럼 우리의 무거운 짐을 드시려고 우리를 위로하고 우리에게 충고하며, 우리를 도우시려고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당신의 삶을 같이 나누도록 허락해 주십니다…. 우리는 더욱 깊이 주님과 결합되고, 주님 안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과 결합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고독은 아주 끝나게 됩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의 의견을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주님과의 일상적인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은 주님이 좋아하시는 것과 싫어하시는 것에 대해 훨씬 더 민감해집니다.
우리는 아주 많은 쓸데없는 일들을 하느라고 시간을 보냅니다. 책과 잡지와 신문에서 갖가지 객설을 모두 수집하고, 몇 시간씩 찾집에 앉아 있고, 길거리에서 수다를 떨지요. 아침에 한 시간만이라도 정신이 흩뜨러지는 대신에 정신을 집중하는 일이 정말 불가능할까요? 이 한 시간 동안에 우리가 하루 온종일과 대결할 힘을 얻도록 말입니다.(-533)
사진: 이태리 스페코디나르니(성프란치스코 은둔소)
Photo: Italy Speco di Narni San Francesco
-------------------------------------------------------------------
<1분 수요 강좌>
교회사 강좌
세계교회사
고대 그리스도교
제1기 1-311년
제6절 알렉산드리아 그리스도교 학교의 기원
알렉산드리아 학교의 유형적 특징은 무엇이었을까? 이 학교는 교회의 목적 때문에 설립된 시설이 아니었고, 교리교사 학교도 교회의 신학대학도 아니었으며, 최근의 연구가 지적하였듯이 자유로이 개인적인 주도로 설립되었다는 점이 특색일 것이다. 만약 이것을 현실로 옮겨 놓는다면, 이 시도를 크나우버는 “정말로 장엄한 시야가 열련다. 즉, 그리스 학문 세계의 수도에서 억제하기 어려운 선교적인 충동으로 가득찬, 또한 자신도 이 길을 통하여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교사가 철학자의 복장을 하고, 자신의 이교적 주변세계의 젊고 늙은 지혜의 탐구자와 지혜의 애호자들을 위하여, 완전히 당시 시대의 양식으로 ‘학교’를 경영하고 있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클레멘스는 “최초의 그리스도적인 학자”로 불릴 수 있다. 그는 성서에 정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모든 세속 지식도 갖추고 있었으며, 그리스 철학과 고전문학에도 매우 정통해 있었다. 그는 젊은 사람들의 문제와 고민을 이해하였는데, 당시의 교육 중심지인 아테네와 로마, 안티오키아에서 온 그들은 일찍이 클레멘스 자신도 그랬던 것처럼 그들 역시 그곳의 강의에 만족하지 못하였으므로, 이제 그리스도교 계시에서 궁극적인 최고의 지혜를 찾으려 하였고 또한 발견하였다. 아마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교를 그노시스적인 혼합주의의 혼란한 형식에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클레멘스는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의 그릇된 관념을 해결해 주고, 그들을 서서히 오류로부터 순수하고 참된 그리스도교의 그노시스로 인도해야 하였다. 그는 철학가처럼 생활하고 가르쳤고, 또한 그 시대 지혜 교사들의 형식과 언어를 사용하였다. 오리게네스도 이 점에서 그를 따랐다. 이 사람들이 동시대 이교 철학가들의 외적인 복장과 표현 형식만이 아니고, 그들의 주제에도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바로 하나의 획기적인 행위”였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그노시스에서 인기있는 우주론을 다루었다면, 그들은 이 사상들을 처음부터 불합리한 것으로 취급하고 간단히 배척하려는 의도에서 한 것이 아니고, 우주의 기원, 창조신,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느님 로고스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에 대한 것 등 종교적인 근본 문제들이 어떻게 그리스도교 시 안에서 궁극적이고 심오한 해답을 발견하는 가를 밝히려 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철학가 복장을 한 그리스도교의 사자使者”들이 되고 싶어하였다. 특히 클레멘스는 “그야말로 그리스 정신세계의 선교사였다. 그는 처음으로 … 그의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승리 의식에서 전력투구하여 당시의 이교적인 ‘학자권’ 에 대해서 더 큰 규모의 정복을 위하여 돌진하였다”. 그때 그의 관심은, 첫째로 온전히 신학적인 것이 아니라 사목적인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청중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쟁취하고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려고 하였다.(-51)
'Dominic Ko 신부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16년 1월 29일 금요일 묵상과 기도 / 고 도미니코 신부님 ~ (0) | 2016.01.29 |
---|---|
~ 2016년 1월 28일 목요일 묵상과 기도 / 고 도미니코 신부님 ~ (0) | 2016.01.28 |
~ 2016년 1월 26일 화요일 묵상과 기도 / 고 도미니코 신부님 ~ (0) | 2016.01.26 |
~ 2016년 1월 25일 월요일 묵상과 기도 / 고 도미니코 신부님 ~ (0) | 2016.01.25 |
~ 2016년 1월 24일 연중 제3주일 묵상과 기도 / 고 도미니코 신부님 ~ (0) | 2016.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