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ominic Ko 신부님

~ 2016년 1월 30일 토요일 묵상과 기도 ~

2016년 1월 30일 토요일 묵상과 기도

<성무일도> 필립 2,14-15
무슨 일을 하든지 불평을 하거나 다투지 마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은 나무랄 데 없는 순결한 사람이 되어 이 악하고 비뚤어진 세상에서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하늘을 비추는 별들처럼 빛을 내십시오.

응송
◎ 소리쳐 부르는 곳, 주여, 당신이오니, * 이 몸이 피할 곳은 당신이외다.
○ 생명의 나라에서 내 몫이외다.


<청원기도>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충실한 여종이 되게 하셨으니,
― 마리아의 전구를 들으시어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를 허락하소서.
◎ 당신 성자의 모친을 보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오늘의 복음 말씀> 마르 4,40-41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영적 독서> 내적 침묵으로 향하는 길, 에디트 슈타인, 이연행 옮김

3. 사랑하는 님, 여기 계시며, 오시네

진리 안에서는 신앙과 자유가 단 하나의 것이며 또 같은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굳게 버티는 것과 완덕의 길에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두 가지 모두 우리 자신을 고양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영혼이 성령으로부터 다시 태어나면서 극단적으로 변화된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개인적 특징들로 짜여져서 자신의 삶이 되었던 이 삶은 성령께로 거두어 들여집니다. 이로써 모든 관계들은 자연스런 이성으로 환원되고 이로 인해 야기되는 반응의 여러 유형들로 환원됩니다. 그래도 우리의 영혼에 있어서 가장 고유한 것 우리가 개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개성은 신성 불가침한 것입니다.

내적 삶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모든 시대에 걸쳐 경혐한 바는 이런 것입니다. 즉 그들은 외부 세계의 전체보다도 더 강렬하게 그들을 이끄는 무엇인가를 통해서 그들 내부의 양심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강력하고도 더 고양된, 초자연적이고 전지전능한 새로운 삶이 자신의 안으로 뚫고 들어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내가 개종을 하기 전부터 개종 후 얼마 동안까지의 중간 시기에 나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종교적 삶을 산다는 것은 하느님 것만 생각하면서 살기 위해 이 지상의 일을 모두 내버린다는 뜻이라고 말입니다. 차차 내가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반대로 이 세계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언가 다른 것이며, 또 가장 관상적인 삶에 있어서도 이 세상과의 관계는 단절되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540)

사진: 이태리 스페코디나르니(성프란치스코 은둔소)
Photo: Italy Speco di Narni San Francesco
-------------------------------------------------------------------
<1분 토요 강좌>
종교 간 대화 강좌
간디어록, 리처드 아텐베러 편 /최현 옮김

방법으로서 내가 지향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비폭력을 과학적이고 이성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우선 지금까지 보여왔던 것보다 더욱 큰 신념을 비폭력에 쏟을 수 있으면 지원자임을 분명히 시인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체포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경우 최종적인 단계에 가서는 지원자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며 따라서 완전 실패일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답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정반대였다. 비폭력 투쟁은 한 사람만으로도 가능하다. 반면 사탸그라히가 아닌 사람들이 수백만 명이 있어도 비폭력 투쟁은 성립될 수 없다. 그리고 나로서는 손상되지 않은 비폭력으로 완전히 실패하는 쪽이 백지장 한 장의 차이로 미진한 성공을 거두는 쪽보다 더 반갑다.
비폭력에 관한 한 타협하지 않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면 끝에 가서 남는 것은 재앙뿐이다. 왜냐하면 결정적인 순간에 이런 비폭력이라는 저울에서 우리는 체중미달이 될지도 모르며 갑자기 우리 앞에 나타날지도 모를 무질서의 힘에 대처할 만한 힘이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무차별적으로 인원을 모집하는 과오를 저질렀으니 그 잘못을 어떻게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회복시킬 것인가? 비폭력은 지고의 질서에 대한 용기 그리고 고통의 감수를 의미한다. 따라서 설사 약간의 고귀한 목숨을 앓는다 할지라도 노골적인 혹은 더욱 나쁜 협박에는 굴복할 수 없는 것이다. 협박 편지를 쓰는 사람들은 그들의 위협을 듣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동시에 그들의 질병을 진단받고 치료받아야 한다. 군다들 역시 우리들의 일부분이므로 그들도 부드럽고 다정하게 다루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볼 때 사람들이 군다이즘을 따르는 이유는 군다이즘을 좋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 내부에 깊숙이 뿌리박힌 질병의 증세인 것이다. 동일한 법률이 정부조직 내에서도 우리와 내적(군다이즘의 관계를 다스려야 한다.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잘 조직된) 군다이즘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내적 군다이즘을 다스릴 능력이 있다는 것도 더욱 통감하게 될 것이다.
그 다음 그 질병을 다루는 데 있어서 -물론 의회도 다른 시민과 똑같은 방법으로 도움을 받을 기회는 열려 있지만-우리는 경찰의 도움올 바라지 않을 것이다. 내가 제안하는 방법은 개선과 전환과 사랑의 방법이다. 경찰의 도움을 바라는 것은 처벌과 공포의 방법이며 사랑이 결핍된 방법이다. 따라서 이 두 방법을 동행할 수 없다. 때로는 개선의 방법이 어려운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다.(-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