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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inic Ko 신부님

~ 2016년 2월 1일 월요일 묵상과 기도 / 고 도미니코 신부님 ~

2016년 2월 1일 월요일 묵상과 기도

<성무일도> 유딧 8,25-26a. 27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조상들을 시험하셨듯이 지금 우리를 시험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어떻게 하셨는지, 이사악을 어떻게 시험하셨는지, 그리고 야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의 충성심을 단련하시기 위하여 불과 같은 시련을 그들에게 주셨지만, 우리는 그와 같이 처벌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주님께서는 당신께 가까이 가는 사람들을 깨우쳐 주시기 위하여 채찍으로 가르쳐 주실 뿐입니다.

응송
◎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흐뭇이 즐거워 하라. * 올바른 이라야 찬미가 어울리도다.
○ 새로운 노래 불러 찬미하라.


<청원기도>
오늘 주님을 섬기도록 우리를 불러 주시는 그리스도여,
― 형제들에게 대하여 여러 가지 당신 은총의 봉사자가 되게 하소서.
◎ 주여, 당신을 찬미하며 당신께 희망을 거나이다.

<오늘의 복음 말씀> 마르 5,8-13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그래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영적 독서> 내적 침묵으로 향하는 길, 에디트 슈타인, 이연행 옮김

3. 사랑하는 님, 여기 계시며, 오시네
하느님의 성령은 의미와 힘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에 새로운 생명을 주고 영혼이 자신의 천성으로는 시도할 수 없을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리고 성령은 영혼의 행위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동시에 지적해줍니다.
진실로 살아 있는 믿음이 있는 곳,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의 가르침과 ‘공적’들은 삶의 내용이 됩니다.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여기에 성스러운 현실주의가 있습니다. 즉 성령으로 새로워진 영혼의 내적이며 자발적인 수용적 자세입니다. 그의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영혼은 적절한 방법으로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깊이를 가지고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기도와 봉헌은, 우리가 얘기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확실히 더 중요하며 내가 믿어 의심치 않는 바와같이, 아주 필요 불가결합니다. 봉사하기 위해 뽑힌다는 것도 하나의 일이 되지만 은총 안에 머물러 있는 것도 또 다른 일이 됩니다. 우리는 판단하지 말고, 하느님의 헤아릴 길 없는 자비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신비들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총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를 깊게 파고 들면 다른 모든 신비들로 귀결됩니다.
물론, 믿음이란 조용한 구석과 몇몇 축일에 국한된 그 무엇이 아니고 삶 전체의 뿌리와 원리적 바탕이 되어야 하며, 이것은 다만 드물게 선택된 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진정한 그리스도교인 각자에게 그래야 합니다.(-544)

사진: 이태리 스페코디나르니(성프란치스코 은둔소)
Photo: Italy Speco di Narni San Franc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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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 월요 강좌>
성서 강좌
필리피서(우정의 편지)

1. 적대자들
바오로는 필리피의 그리스도인들이 악하고 비뚤어진 세대 가운데서 빛을 내고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키면서 흠 없고 순결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필리 2,14-16). 바오로는 복음의 믿음을 위해 한마음(psyche)으로 분투하면서 한뜻(pneuma “영")으로 굳게 서라고 말한다(“영의 친교" 1,27; 2,1). 그러나 필리피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있다. 바오로는 얼마나 많은 그룹을 염두에 두고 있을까? 적어도 세 가지 구별된 입장들을 본문에서 질책하고 있다.

첫째, 필리피에서는 에우오디아와 신티케와 같이 바오로와 함께 일했던 이들 간에 내적 분열이 있다(4,2-3). 분열의 원인은 분명하지 않으나 아마도 바오로가 나무랐던 겸손의 부족과 자만심과 같은 인간 성품 문제일 것이다(2,2-4 참조). 실제로 바오로가 2,6-11의 그리스도 찬가에서 자기를 버린 순종의 본보기로서 그리스도를 제시하는데,이것은 자만심과 자기 이익 추구에 대비되는 것이다.

둘째, 바오로와 함께 일했던 자들과는 별도로,필리피인들을 괴롭히는 적대세력이 있다(1,28-29). 이는 바오로 자신이 처음 그곳에 당도했을 때 당했고 그가 에페소에서도 겪었던 골칫거리의 연속이다(1,30; 사도 19,23-20,1). 이들은 여러 신들을 인정치 않는 그리스도인의 낯선 가르침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고, 그리스도인들을 체포 또는 추방하도록 지역 관청에 호소한 사람들이다. 그러한 부당함으로는 아무것도 이룰수 없기에 하느님만이 승리하실 것이다.
셋째, 바오로가 “개들”이라고 부르는 악한 일꾼이 있는데,필리피인들은 멀리해야 할 자들이다. 아마도 이 무리는 바오로가 “거짓된 할례를 주장하는”(3,2),“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 (3,18),“그들의 끝은 멸망” (3,19)이라고 불렀던 이들과 동일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외면상 할례를 하여 살을 잘라낸다. 그러나 성령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살에 대한 이런 강조에 신앙을 두어서는 안 된다. 바오로는 스스로 나무랄데 없는 유다인 자격을 내세워 이 대적자들을 논박한다. 비록 그가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무엇보다도 존귀하게 여겨 나머지를 모두 쓰레기로 여긴다 말할지라도 말이다(3,4-11) .

우리는 여기서 거의 같은 시대의 갈라티아서에서 할례를 주장했던 자들,곧 유다계 그리스도인에 대한 바오로의 공박과 유사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혹자는 필리피서의 이 대목이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그같은 자를 폭로하는 일반적 경고라고 여긴다. 사실 그들이 이미 필리피에서 활동했다면,바오로는 갈라티아서보다 더 많은 분량을 그들에 대해 할애했을 것이다. 아니면,필리피에서는 적은 무리가 이제 막 나타난 반면 갈라티아에서는 그들이 큰 성공을 누렸을 것이다.
바오로의 적대자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고서도 유다교 시절의 가치관을 여전히 고수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유디주의자라고 한다. 이들의 주장은 이방계 그리스도인이 할례를 받고 유다인으로 귀화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할례는 이들의 특권을 가장 확실하게 보장해 주는 증표였다. 특히 그들은 할례를 받고 어떤 관습법을 따름으로써 의로움과 완전함을(3,9) “지금”(3,12-15 참조) 얻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선언하였다

이에 바오로는 신랄하게 비판하는 뜻이 담긴 언어 유희를 사용하여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다. 즉, ‘'peritomh" (할례) 대신에 “katatomh" (훼손, 절단자, 신체를 훼손한 사람들, 참조 1열왕 18,28; 갈라 5,12) 을 사용한다. 유다인들이 구원을 얻는 수단으로써 순전히 육체적이고 외면적인 의식만을 주장하는 것은 무지몽매할 뿐 아니라 악한 것이기도 하다



Dominic Ko님의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