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26일 금요일 묵상과 기도
<성무일도> 이사 53,11b-12
나의 종은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그들이 떳떳한 시민으로 살게 될 줄을 알고 마음 흐뭇해 하리라. 나는 그로 하여금 민중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대중을 전리품처럼 차지하게 하리라. 이는 그가 자기 목숨을 내던져 죽은 때문이다. 반역자의 하나처럼 그 속에 끼어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그 반역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 때문이다.
응송
◎ 사냥꾼의 올무에서 * 주께서 너를 구하여 주시리라.
○ 모진 괴질에서
<청원기도>
십자가에 달리시어 회개하는 강도를 용서하신 그리스도여,
― 우리 죄인들을 용서하소서.
◎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오늘의 복음 말씀> 마태 21,42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영적 독서> 내적 침묵으로 향하는 길, 에디트 슈타인, 이연행 옮김
8. 십자가의 길에서
우리들은, 각자가 영광 속에서 그 존재가 완성되면, 그에게 주어졌지만 발전되지 못했던 모든 가능성들이 또한 꽃피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영원히 하느님 앞으로 받아들여졌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말로 표현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삶 전체를 포괄하는 인간의 지성은 마지막 일들을 목전에 두고 외면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고찰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인간 존재를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진실 속에서 산다는 것은, 가장 진정한 가능성들을 실현시키고 또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에 때때로 부합되는 그 순간의 요구들을 실현시킨디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눈앞에서 단 한 번도 영원을 보지 못한 채 그리고 그들에게 구원이 문제가 되지도 못한 채로 옵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사실의 상태가 능력 밖의 일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이 결정적인 시간이 저 세상의 어떤 곳에서 오지 않는가의 여부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우리에게 그것이 정말 그렇다고 말해줄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에는 제한이 없다고 믿으면 그것이 만인의 구원에 대한 희망을 증명해줍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말하면 은총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으로 인하여 영원한 천벌도 가능한 것으로 남습니다.(590)
사진: 이태리 스페코디나르니(성프란치스코 은둔소)
Photo: Italy Speco di Narni San Franc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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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 금요 강좌>
신학 강좌
제 4 장 학문으로서의 신학
제 1 절 학문이해와 오늘날의 학문비판
1. 오늘의 상황
일반적으로 학문이란 대충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가능한 한 확실한 지식을 찾아내고 인간의 필요에서부터 출발하여 가능한 한 커다란 충족을 창출해내는 인간의 노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학문은 인간노동의 영역에 속하고, 엄격하게 보아 형이상학적 질문, 다시 말해서 인간과 세상에 대한 경험을 뛰어넘는 의미에 대한 질문을 배제하게 된다. 사람들이 자연과학을 학문의 기본 패러다임으로 간주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그저 상상하거나 짐작하던 것이 확실한 지식으로 전환될 수 있고 필요는 충족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직 연구되지 않은 모든 것은 그저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이고, 아직 충족되지 않은 필요는 그저 아직 충족되지 않은 무엇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를 뛰어넘어 무언가 인간의 관심을 끄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학문들은 실제로 유한한 것들을 대상으로 하는데, 이러한 대상은 인간의 연구활동을 통해 밝혀져야 하고 통제될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해결된 문제는 놀 새로운 질문을 던지기 때문에 끊임없이 지속되는 노력이다. 절대적 초월은 “계시”라고 하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에 의해 밝혀지는 반면, 모든 일반 학문들은 근본적으로 유한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래서 학문들은 학문의 자기이해에서부터 근본적으로는 무신적이다. 다시 말해 “마치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전개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학문의 객관적인 특성이다. 학문의 결과는 그 활용을 통해서 입증되어야 하는데, 이 활용을 통혜서 학문적 탐구노력의 양면성이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원자 분열현상이 발견되고 나서 원자로와 원자탄이라는 활용이 뒤따르게 되었다. 새로운 에너지 이용이라는 측면이 있는가 하면, 인류의 생존에 대한 위협이라는 어두운 면을 함께 안고 있다. 복제, 줄기세포, 인간배아 동에 대한 연구 역시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양면성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학문적 인식의 결과물들이 실제로 활용될 때에야 비로소 학문적 탐구노력의 정체가 무엇인지가 명백해지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견해이다. 모든 인간적 지식은 지배의 욕구로 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지배계급의 사고가 그 시대의 사고를 지배한다고 하는 칼 맑스(K. Marx)의 명제와 맥을 함께 하는 것이다. 계몽주의를 통해서 사람들은 해방되고 세상의 주인이 되리라고 기대하였으나 소위 “계몽된” 세상 역시 온갖 불행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하고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민족들 간의 중오와 세계대전의 결과 등). 이제는 더 이상 학문들이 세상의 역사에 대해 아무 책임이 없는 듯이 말할 수 없다.
학문을 단순히 “자연”에 대한 인식과 자연의 지배를 지향하는 것으로 여기고, 학문을 수행하는 주체를 학문의 대상에서 배제하는 그런 식의 학문이해는 더 이상 성립될 수 없다. 인간이 단순히 “기능수행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소위 “객관적인 학문들”도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이런 학문을 할 수 있는 너는 누구인가, 그리고 네가 하는 학문으로부터 야기되는 것들에 대해 너는 어떻게 책임질 수 있는가?’ 학문의 주체에 대한 질문은 학문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되고 있다. ‘인간이 할 수 있다고 해서, 자기파멸을 감수하고라도 해도 되는지’에 대한 질문은 학문자체의 정당화까지도 뒤흔들 수 있는 질문이다. 도덕적으로 ‘좋은 것’인가라는 질문은 인간에 대한 질문 그리고 진화 안에서의 인간의 위치에 대한 질문과 필연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방법론적으로 책임 있는 반성이 있어야 하고, 철학과 더불어 그리스도교 신학도 처음부터 이런 담론에 기여하고 있다.
앞에서 신학은 신앙학문으로 이해한다고 말했고, 이것은 앞으로 좀 더 깊이 다루어져야 한다. 우선 학문이라는 개념이 신학을 표현하는데 적합한지를 질문해야 한다. 이에 대한 만족스런 대답을 하기 위해 간략하나마 학문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되어야 한다.(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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