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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inic Ko 신부님

~ 2016년 3월 13일 사순 제5주일 묵상과 기도 / 고 도미니코 신부님 ~

2016313일 일요일 묵상과 기도

<성무일도> 성경소구 2고린 4,10-11 참조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언제나 예수를 위해서 죽음의 위험을 겪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을 몸에 예수의 생명이 살아 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응송
주여,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 하소서.


<청원기도>
육신과 영혼의 의사이신 그리스도여, 우리 마음의 상처를 고쳐 주시어,
끊임없이 성덕의 도움을 받게 하소서.
주여,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만들어 주소서.

<오늘의 복음 말씀> 요한 8,10-11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하고 물으셨다.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영적 독서> 성경말씀을 통해 부정적 감정극복하기/두려움, 조이스마이어지음, 문종원 옮김
1. 두려움에 맞서서
기도의 원리
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은 오후 세 시, 기도하는 시간어 되어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었는데...(사도 3,1).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도 생활에 대해 알 수 없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 자신에게 맞는 기도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기도 생활을 해야 할 필요는 없고 또한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물론 반드시 따라야 할 기도의 확고한 원리는 있다.
예를 들면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기도를 하도록 훈련하는 것도 좋다. 사도행전을 통해 볼 수 있듯이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정해진 장소에 가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을 훈련하는 데 유익한 것이고 하나도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도의 시작이 되어야지 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각자에게 맞는 기도 계획을 세워서 무의식중에 생활의 일부가 될 때까지 자신을 훈련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내게는 이를 닦는 훈련이 필요한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오래 하다 보니 이제는 자동적으로 이를 닦는다. 잠자리에 들기 전이나 아침에 일어나서 그리고 매 식사 후에 습관적으로 이를 닦는다. 이를 닦는 것은 나의 정상적인 일상생활의 한 부분일 뿐이다.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하는 생활을 시작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는 훈련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 자신을 훈련시키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이마도 그 일은 의식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 되어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시도록 우리를 내맡길 수 있다면, 성령께서 우리를 끊임없는 기도 생활로 이끄셔서, 기도하는 것이 숨 쉬는 일처럼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지속적으로 기도를 드릴 수있게 될 것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다.
하느님, 참으로 좋은 아침입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또 아침 식탁에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
아버지, 당신은 참으로 좋으신 분이십니다.
출근길에 차를 타고 가면서도 기도드릴 수 있다.
하느님,오늘 저를 위해 해주실 모든 좋은 일들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낮이나 밤이나 온종일 계속해서 주님과 대회를 나누며, 주님께 찬앙과 흠숭을 드리고, 주님의 현존에 감사하며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주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밤에 잠들기 전 마지막 기도로 그날 주신 축에l 감사를 드린 후 평회롭고 상쾌한 잠을 청할 수 있다.
아마도 사탄이 우리에게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제대로 된 자세가 아니며 정식으로 승인된 교회의 언어도 아니라고 속삭이면서 잘못된 기도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때가 바로 사탄을 패배시킬 수 있는 때이다. 기도라는 것은 몸이나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생각과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를 하면 권능을 얻는다!

사진: 이태리 뽀지오부스토네(성프란치스코 은둔소)
Photo: Italy Poggiobustone San Franc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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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313일 사순 제5주일 강론
고 도미니코 신부

오늘을 사순 제5주일입니다. 사순시기의 막바지에 이르는 오늘 복음은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는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간음과 정결에 대해서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십계명에 의거하여 간음을 절대적으로 단죄합니다. 구약시대부터 아내에게는 절대적인 정결이 요구되어 왔는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으로부터 기대하시는 충실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예언자들은 계약에 대한 불충실을 정신적 간음이라고 비난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표상을 사용하시어 그 당시 사람들의 결핍된 신앙을 꾸짖으셨으며, 표징을 요구하는 불신앙자들과 당신과 당신의 복음을 부끄러워 하는 불충실한 자들을 악하고 간음하는 세대(마태 12,39; 마르 8,38)라고 부르십니다. 야고보 역시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세속에 대한 사랑을 타협시키는 것을 간음으로 간주합니다.(야고 4,4). 바오로는 사람을 하느님 나라에서 제외시키는 이 죄를 피하기 위하여 사랑 안에서 정결의 원천을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베니스의 통령(統領) 도겔(Dogel)은 취임 의전을 거행할 때 아드라해 바닷물에 반지를 하나 던져 넣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해상공화국 베니스, 곧 바다와 혼인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바다 속에 있는 들까지 전부 끌어 안고 바다의 모든 것과 결혼함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부부와의 혼인성소 그리고 독신으로 사는 사제나 수도성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의 혼인은 배우자뿐만 아니라 그 식구, 친적들 그리고 공동체의 미운면과 부족함 모든 것들을 끌어안고 혼인하는 것입니다. 부부에게는 서로간의 사랑 하나만이 정결 생활의 결정적 이유이듯 사제나 수도자들에게는 하느님의 사랑 하나만이 유일한 기준입니다.

이처럼 정결의 사랑은 궁극적으로 인간 본질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고 인간을 변화시켜 가장 신비롭게 그리스도를 닮게 만들어 줍니다. 정결의 진정한 가치는 하느님과 이웃에게 봉사하려는 즉 사랑하려는 원의에서 시작되고 실천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랑과 원의는 순수하고 단순한 순결을 지니게 해 줍니다.

이러한 정결의 사랑이 뒷받침 되지 않을 때 부부성소이든 사제, 수도성소이든 순결한 마음을 잃어 지나친 잘못된 우정을 맺을 수 있습니다. 가령 분별없는 지나친 만남, 쓸데없는 메시지 왕래, 불명료한 대화, 개인적이고 그리고 정기적인 값비싼 선물교환으로 표현되는 친밀하고 감상적인 애정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또한 신앙적인 것으로 위장된 쾌락과 로맨틱한 사랑이 되어 폐쇄적이고 불행한 간음적 우정이 되고 맙니다.

반대로 정결의 사랑이 뒷받침 될 때 분별력 있는 신중한 우정으로 충동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평가된 우정, 시련을 거친 우정으로 선한 의지를 갖추어서 기쁠때에도 어려울때에도 여전히 충실하게 남아 있는 우정이 됩니다. 그래서 개방적이고 보편적이고 진실은 우정이 되게 됩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쾌락적이고 파멸을 초래하는 우정이 아니라 순수하고 정결한 사랑을 지니고 자유롭고 보편적인 하느님 사랑을 지닌 순결한 우정으로 거듭나도록 주님께서는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Dominic Ko님의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