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8일 금요일 묵상과 기도
<성무일도> 이사 52,13-15
“이제 나의 종은 할 일을 다 하였으니, 높이높이 솟아오르리라. 무리가 그를 보고 기막혀 했었지. 그의 몰골은 망가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었고 인간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제 만방은 그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제왕들조차 그 앞에서 입을 가리우리라. 이런 일은 일찍이 눈으로 본 사람도 없고 귀로 들어 본 사람도 없다.”
응송
◎ 사냥꾼의 올무에서 * 주께서 너를 구하여 주시리라.
○ 모진 괴질에서
<청원기도>
믿을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수난의 영광으로 우리를 새로이 창조하신 우리의 스승이시며 구세주시여,
― 우리의 악한 행동으로 옛사람이 되는 일이 없게 하소서.
◎ 주님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려 주소서.
<오늘의 복음 말씀> 요한 10,34-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영적 독서> 성경말씀을 통해 부정적 감정극복하기/두려움, 조이스마이어지음, ’문종원 옮김
3. 기도의 종류
찬미 찬양 기도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언제나 하느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립시다. 하느님의 이름을 우리의 입으로 찬양합시다(히브 13,15).
나는 우리 모두가 찬미와 찬양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찬미는 하느님의 선하심을 진심으로 아뢰는 것이고, 우리를 위해서 하신 모든 선한 일들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찬양은 온전히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으로, 이것은 하느님께서 ‘공경받아 마땅한 분’임을 인식하고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그분이 무엇을 하는 분이신지를 깨닫는 것이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가 언제나 하느님께 찬미와 찬양을 드려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우리는 찬미와 찬양의 기도를 매순간 안에서나 밖에서나 밤이나 낮이나 숨 쉬는 것처럼 그분께 바쳐야 한다.
우리는 항상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고, 진심 어린 찬미와 찬양의 기도 안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계속 깨닫고 신앙을 고백하며 영광을 드려야 하는 것이다.(663)
사진: 이태리 뽀지오부스토네(성프란치스코 은둔소)
Photo: Italy Poggiobustone San Franc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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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 금요 강좌>
신학강좌
제4장 학문으로서의 신학
제1절 학문이해와 오늘날의 학문비판
4) 국채적인 토론올 통한 연구결과에 대한 검토
학문은 학자들의 국제적인 토론에 의거하는 상호 통교적인 무엇이다. 요즈음 특정한 연구결과들의 “중명가능성”과 관련하여 자연과학적 영역에서조차도 주저하게 되었다. 새로운 인식은 자연과학의 영역에서도 그것이 근거 있는 가설이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공동연구가들을 통한 확인을 필요로 하고 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리고 학문적 진술은 어느 분야의 모든 학자들이 함께 주장한다고 해서 반드시 “참된” 것은 아니다.
5) 연구관심사(무엇을 위한 연구인가)에 대한 숙고
오늘날의 학문적 연구는 많은 관점에서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학문적 연구가 - 지배구조를 지향하는 - 권력획득 혹은 전쟁수행의 우위를 지향하고 있는지 혹은 인간들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와 평화로운 공동의 삶을 지향하고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한다. 학문적 연구는 다른 사람들(연구 과제를 부탁하고 연구비를 제공하는 사람들)에 의해 권력획득을 위한 수단으로 오용될 수 있지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6) 학문 상호간에 책임질 수 있는 학문윤리
“학문윤리”라는 표제어는 학문과 어울리지 않는 듯이 보인다. 학문들이 그 연구와 응용에 따르는 위험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느냐 하는 근본적인 반성이 요구된다. 학문은 지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가는 사람들 그리고 전체 인류 앞에 책임을 져야 한다. 같은 이념을 가지고 있는 동맹국들이나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 또는 자금 공여자들에게만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학문은 특히 약자의 입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모든 학문적언 노력, 특히 경험적인 학문들의 영역에서는, 새로운 기술들을 통해 더욱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된 사람들 앞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런 학문윤리의 문제들은 외부로부터 뿐만 아니라, 개별 학문분야들 안에서 자체척으로 개발되어 학제간의 윤리적 논의가 심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연구위험과 응용위험들을 최소화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모든 학문들이 가능한 위험들에 대한 책임을 함께 져야지, 어느 특정 학문에 인류의 모든 운명을 내맡길 수 없게 되었다. 학문윤리를 학문의 변방영역으로부터 학문들의 중심으로 이끌어 들여 학문 상호간을 연결시켜야 할 때가 되었다. 학문이 권력의 도구, 전쟁의 도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더 이상 윤리적으로 반성하는 일을 미루거나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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