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이미 공생활 초기부터 여러 번에 걸쳐 당신의 메시아적 사명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2,18; 5,16; 8,25 참조).
그럼에도 유다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물고 늘어지며 또 다시 공개적으로 인정해주기를 요청합니다 (10,24).
예수님께서 당신의 메시아 사명을 밝히시자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은 그분을 신성모독죄로 고발하고 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아버지와 하나인(10,30) 착한 목자로 밝히시면서 양들과의 관계를 알려주십니다.
목자와 양의 비유 자체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목자의 비유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목자들은 당시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이 가난한 목자 가운데 ‘착한 목자’로 인식하십니다. 양들은 그런 가난하지만 착한 목자의 돌봄 속에 생명을 유지합니다.
목자들이 다 ‘착한 목자’는 아닙니다. ‘착한 목자’가 되려면 양들과 함께 하고, 양들을 사랑하며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바칠 줄 알아야 합니다 (10,11).
한마디로 목자와 양의 관계를 맺어주는 끈은 사랑이요, 그 관계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내 양들을 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알며 온정을 가득 품는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목자는 가난하지만 척박한 땅에서 생명을 키워가는 양들의 가난한 처지를 함께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양과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깊은 관심과 애정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좋은 풀밭으로 인도하고, 비바람을 피하도록 해주고, 아플 때 밤새워 보살피고, 온갖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것입니다.
목자는 그렇게 자기 양들을 일일이 기억하고 잘 알게 됩니다.
또 양들은 목자의 사랑의 돌봄 때문에 자기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릅니다 (10,27).
사랑은 사랑을 불러일으켜 목자의 사랑의 마음을 알아보는 양들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를 알고 그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주님의 목소리를 잘 들을 수 있는 귀를 지녀야 합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양들을 극진한 온정으로 품는 목자가 있는지 묻게 됩니다.
정치이념을 신앙의 가치보다 앞세우며, 신앙의 이름으로 신자들을 가르고, 하느님께서 주신 가장 소중한 인간의 존엄성마저 뒷전으로 팽개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이들의 슬픔에 함께 울어주고 고통을 함께 숨쉬는 애정 깊은 목자가 그리운 때입니다.
저 자신을 포함해서 통렬한 회개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나는 자신이 주님께 속한 양인지 인식하고 있으며, 그분께서 끊임없이 사랑을 주고 계심을 알고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과 이성만으로 주님을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더 나아가 사랑의 실천으로 드러나는 행동만이 주님을 안다는 결정적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1요한 2,4)로 살아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랑의 부르심을 받고 사랑 속에 살아가는 우리도 진정으로 주님께 감사드려야겠습니다.
갈림 없는 마음으로 그분을 섬기고 진리의 말씀을 따르도록 해야겠습니다.
목숨 바쳐 사랑해주시는 그분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내 목숨을 내어놓을 줄 아는 양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의 성소요, 그렇게 살 때만이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임을(10,28) 명심하는 오늘이었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너 나를 사랑하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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