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양들의 목자”(10,2)요 “양들의 문”(10,7)이라고 밝히십니다.
이 말씀은 왜 오셨으며 하느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하실 것인지 알려주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양우리 안과 밖, 양우리의 문으로 들어가는 목자와 울타리를 넘어 들어가는 도둑의 대조를 보여줍니다.
이 대조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당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되는’(10,10) 참 행복에 이를 수 없음을 가르쳐주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터는 양우리 안과 바깥, 곧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환경과 다른 이들, 공동체 안과 바깥, 교회 안과 세상으로 나뉩니다.
사실 이런 구분은 살아가는 방식과 영역의 차이 때문에 드러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양우리 안팎을 오가며 양들을 돌보고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이처럼 양우리 안에서든 밖에서든 주님의 영과 생명이 넘쳐야 할 것입니다.
나는, 우리는, 또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하느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언제 어디서나 함께하시는 착한 목자를 잊고 살 때가 많지요.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이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디에서든 인간이기에 행복하고 살아갈 의미가 있는 세상이 바로 그분이 원하시는 양우리이겠지요.
우리가 착한 목자를 따르는 양으로 살고 있는지는 세상 밖으로 눈을 돌려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 자신 안에, 나 가정에,우리 공동체과 사회에 예수님의 기쁜 소식이 퍼지고 있습니까?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과 사회에 만연한 인간 차별, 경제논리에 물든 혼탁한 가치관, 집단적 이기주의를 따르는 정치가들의 행태 속에 하느님의 혼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 원인의 하나가 나의 무관심이나 이기심과 탐욕 때문은 아닐까요?
늘 그분과 함께 있다는 현존의식, 그분을 의식하며 말과 생각과 행동을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자세가 미지근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양우리 안을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감옥으로 바꿔버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할 때입니다.
또한 ”양들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지 살펴야겠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문이시라면 나의 말도, 생각도, 판단이나 행동도 그 문을 통과한 다음에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내 삶의 기준을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삼는다면, 나 자신이 곧 ‘문이 아닌 다른 곳으로 넘어 들어가는 강도나 도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내 삶의 근거와 방향은 문이신 예수님을 통과 시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문이신 그분을 통과한다는 것은 그분의 진리의 말씀과 목숨마저 내놓는 사랑,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며 생명의 호흡을 되살리는 그분 안에 머무는 것이겠지요.
오늘도 사랑으로 함께해주시는 예수님의 이끄심을 따라 양우리 안팎을 그분의 마음과 눈길로 바라보며 참 행복을 갈망하는 복된 날이길 기도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나를 사랑하는 그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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