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6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2021.07.06.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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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보는지 물으십니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마태 9,33)
예수님께서 말못하는 이에게서 마귀를 쫓아주시자 군중이 놀라서 탄복합니다. 신체적 결핍으로 참 고통스러웠을 한 형제가 온전함을 회복한 놀라운 순간이니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지요.
그들은 이 기적에서 하느님의 권능을 입고 오신 메시아를 봅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예수님의 현존을, 이제 이스라엘을 이민족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실 메시아의 도래처럼 받아들입니다. 메시아를 통해 다가온 하느님의 권능을 바로 그 현장에서 자기들의 눈으로 확인한 것이니 흥분하지 않을 수 없지요.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태 9,34)
그런데 다른 시각도 존재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이 기적을 냉혹한 시선으로 보며 비판합니다. 선하고 복된 일에서 하느님을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귀를 떠올릴 수도 있나 봅니다. 마귀의 힘이 회복이 아닌 훼손과 파괴임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보고 싶은 대로 보기 때문일 겁니다. 군중이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을 경외의 눈으로 보았다면 바리사이들은 혐오와 비하의 시선으로 경계하는 겁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9,36)
가엾은 마음. 이것이 예수님의 시선입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으로 사람을 바라보십니다. 그분은 저마다 약하고 아프고 슬픈 사연을 짊어진 채 나름 애쓰며 살아가는 실존들이 그저 안타깝고 또 소중하십니다. "왜 그것밖에 안 돼냐? 뭐가 그리 힘들다고. 다 네가 잘못해서 그런 거지. 넌 가망이 없다. ..."는 등의 혹독한 비난은 그분의 언어가 아닙니다.
제1독서에서는 야곱의 귀향 장면이 펼쳐집니다.
"그 무렵 야곱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데리고 야뽁 건널목을 건넜다."(창세 32,23)
아버지의 복을 가로챈 야곱이 형 에사우의 분노를 피해 도망갔던 길을 지금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강을 건너는 이 상징적인 순간은 형제에게 해를 입히고 홀로 떠났던 죄스런 과거를 정화하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하는 시공간입니다.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창세 32,27)
야곱은 신원을 알 수 없는 누군가와 밤새 씨름을 합니다. 형 에사우를 만나는 일처럼 이 또한 목숨을 걸어야 하는 과정입니다. 성경 저자는 야곱과 씨름을 한 이가 하느님, 또 그분의 천사라고 해석합니다. 실제로 야곱은 목숨을 건 이 투쟁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지요.
아울러 이 씨름은 야곱 자신이 내면에 스스로 거짓 우상처럼 박아둔 에사우의 허상과의 싸움일 수도 있습니다. 또 야곱 안에 짙게 드리운 비겁하고 약삭빠르고 탐욕스런 거짓말쟁이 사기꾼적 면모를 떼어내는 혹독한 작별의 싸움이기도 할 겁니다. 도망올 때는 그런그런 습성을 주렁주렁 달고 건넜을지 몰라도, (미래의 벤야민까지)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될 열두 아들을 거느리고 고향을 향하는 지금은 온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프니엘을 지날 때 해가 그의 위로 떠올랐다. 그는 엉덩이뼈 때문에 절뚝거렸다."(창세 32,32)
하느님과 목숨을 건, 끈질기고 격렬한 씨름이 끝난 후, 그의 위로 "해"가 떠오릅니다. 앞으로 이스라엘에게 펼쳐질 밝고 영광스런 약속의 실현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이 씨름으로 얻은 상처는 그로 하여금 자신(이스라엘)이 원래 어떤 사람(존재)이었고 어떤 과정으로 하느님의 사람(백성)이 되었는지를 제 안에 영원히 각인하는 표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사람, 어지간해서는 바뀌지 않는다'는 자조적인 말 많이들 듣지요?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다'라는 우스갯소리도 회자되고요. 하지만 육적인 생명에서 영적인 생명으로 건너온 우리 그리스도인은 변화와 쇄신, 초월의 동력을 뼛속까지 품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우리 안의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니까요.
물론 쉽지 않습니다. 사사건건 티나 흠, 잘못된 것, 틀린 것, 허점과 흉만 보는 사람이 자기 시선에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이상 바꿀 생각조차 하지 못하니까요. 운 좋게 애정 깊은 조언자를 만나 굴절되고 왜곡된 자기 시선을 알게 되더라도, 그 구습을 떼어내기 위해서는 오늘의 야곱처럼 '변화될 때까지는 당신을 놓아드리지 않겠다'는 진지하고 결연한 각오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바리사이의 왜곡된 시선에서 군중의 경외의 시선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님의 연민의 시선을 얻기까지, '당신과 연민의 사랑을 공유하는 축복을 받기 전에는 당신 곁에서 한 발자국도 떼지 않겠다'고 끈질기게 그분께 매달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처럼 바라보게 해달라고, 주님을 닮게 해 달라고 매달리는 비장한 씨름이 곧 뜨거운 사랑의 기도일 것입니다. 주님 사랑의 축복에 목숨을 건 여러분 모두를 응원합니다. 오늘도 힘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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