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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연중 제 3주간 금요일 / 오상선 신부님 ~

 

 

 

오늘 미사의 두 독서 말씀은 그 분위기가 상당히 대조적입니다. 복음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희망적으로 드러내는 반면, 제1독서는 하느님이 아끼시는 이의 엄청난 죄악을 여과 없이 밝히고 있습니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마르 4,28).
예수님은 먼저 하느님 나라를 저절로 자라는 씨앗에 비유하십니다. 사람이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김을 매어 주기는 하지만 그건 씨앗이 자랄 환경을 조성하는 것일 뿐, 사람은 씨앗이 열매가 되는 본질적 힘이 아닙니다.

"사람은 어떻게 그리 되는지 모른다"(마르 4,27).
그래서 예수님은 모른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인간의 사고와 경험을 뛰어넘습니다. 인간은 하느님 나라가 형성되는 원동력에 대해 무지하지만 그것이 하느님 나라가 열매 맺는데 장애가 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예수님은 두 번째 비유로 겨자씨를 드시면서, 씨앗의 미소한 크기와 성장한 후의 풍성함을 대비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 지상에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는 세상 변두리에서 초라하고 보잘것없이 시작되었지만, 온 세상을 품게 되리라는 전망이 담겨 있습니다.

제1독서는 다윗 임금의 치명적인 죄악을 다룹니다.

"해가 바뀌어 임금들이 출전하는 때가 되자, 다윗은 요압과 자기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을 내보냈다 ... 그때 다윗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2사무 11,1).
이 배경 설명은 다윗의 일탈을 복선처럼 준비합니다. 임금들이 전쟁에 출전하는 때에 굳이 다른 이들을 내보내고 임금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는 자체가 납득하기 어려운 불안감을 일으킵니다.

"집으로 내려가지 않았다"(2사무 11,9.13).
밧 세바의 남편인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드러나는 말씀입니다. 그는 충직하고 절제력 있고 전우들에 대한 의리도 출중한 의인이었기에 다윗의 잔꾀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우리야가 이런 훌륭한 성정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니 이 얼마나 불합리한 비극인지요!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도 죽었다"(2사무 11,17).
결국 다윗이 뜻을 이룬 것처럼 보입니다. 이대로라면 세간의 눈에 다윗은 남편 있는 여인을 유린한 간통 범죄자가 아니라, 유복자를 임신한 과부를 맞아들인 성군이 될 테니까요.

성경 저자가 각색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폭로하는 역사를 읽다 보면 인생사 참 모를 일이다 싶습니다. 하느님의 총애를 받은 다윗이 간음에 살인교사까지 저지르면서 제 욕망을 채우는 모습이 낯설기도 합니다. 이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통합되지 못하고 오히려 극악무도한 폭력으로 변질된 전형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이런 인간의 악행에도 하느님 나라의 형성이 중단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악행으로 취한 밧 세바를 통해 이스라엘 왕조가 그 전성기를 맞게 될 것을 압니다. 마태 복음서 저자도 예수님의 족보에서 솔로몬의 어머니를 굳이 "우리야의 아내"(마태 1,6)라 밝히는 걸 보면, 인간의 역사가 죄악과 은총의 공존 속에 흘러가고 있음이 보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솔직히 "모른다"고 해야 옳습니다. 씨앗이 열매가 되고, 미소한 것이 거대하게 되는 자연의 이치를 모르는 것 이상으로, 하느님 나라의 형성에 대해서도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의 이기적이고 편협한 이해 범주 안에서 논리와 계산대로 되어간다면 그건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이천 년 전 십자가에 달려 죽어간, 실패한 가난뱅이 몽상가에게서 오늘날 세상을 품는 자비와 사랑의 연대를 관상할 수 있었던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을까요!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무지를 틈타 그렇게 자라서 열매 맺고 확장되어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약함과 죄악에 질식되지 않고 지금도 자라고 있습니다. 바벨탑처럼 쌓여가는 인간의 오만하고 불의한 폭력도 하느님 나라를 좌절시키지 못합니다. 세상 곳곳에서 진실한 믿음과 소박한 사랑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가 그 증거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비록 하느님의 나라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무지하더라도, 이미 하느님 나라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모여 하느님 나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