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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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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 1주간 금요일 / 오상선 신부님 ~ 마르코 복음사가는 계속해서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예수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어제의 나병 환자 치유에 이어 오늘은 중풍 병자 치유 이야기입니다. 나병 환자와 중풍 병자는 예수님의 치유기사의 단골 메뉴로 자주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당시 가장 무섭고 힘든 병으로 알려졌고 그래서 이는 자기나 조상들의 죄 때문에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느님도 외면하는 공적인 죄인이었고, 하늘 나라에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천형(天刑)을 받는다고 여겨졌던 사람들을 그 고통에서 치유시켜 주십니다. 그러나 육신의 치유가 곧 구원은 아니었습니다. 반쪽짜리 구원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고 하십니다. 육신은..
~ 연중 제 1주간 목요일 / 오상선 신부님 ~ 연중 제1주간 목요일 (마르코 1,40-45) 여러분은 어떤 마음의 소유자입니까? 완고하고 무딘 마음의 소유자입니까? 아니면,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의 소유자입니까?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완고한 사람이 된다고들 하더군요. 오히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야 정상일 것 같은데 그게 잘 안된다네요. 아마도 자신이 구축해 온 경험세계가 더 단단해진 탓이겠지요. 완고하고 마음이 무딘 사람은 "다른 사람이 말해도 생각이나 사고를 바꾸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이 말씀하셔도 못 알아듣고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결코 영적으로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세계에 갇혀 더 큰 세계를 볼 수 없기 때문이지요. 반대로, 예수님처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
~ 연중 제 1주간 화요일 / 오상선 신부님 ~ 오늘날 권위주의가 타파됨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철통같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정치가들이 민초들의 힘에 무릎을 꿇게 되고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모든 사람의 동등한 인권이라는 본래의 모습으로 점점 돌아가고 있음은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금까지 편중되게 권위를 누려왔던 가부장적 서열주의도 무너져 남녀간의 차별, 노사간의 차별, 선생과 학생의 차별, 상사와 부하직원의 차별 등 직위와 기능의 차이가 인간이 공통으로 누려야할 권위에 차별을 낳아서는 안 된다는 것은 참으로 기뻐할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참다운 권위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부모의 권위, 스승의 권위, 정치가의 권위, 성직자의 권위가 점점 땅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권위주의는 타파되어야 하지만 ..
~ 연중 제 1주간 월요일 / 오상선 신부님 ~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을 잘 들으시나요? 잘 못들으신다구요? 왜 그럴까요? 그분이 말씀하시지 않아서 못들을 수도 있고 그분이 말씀하시는데 내가 못알아 들을 수도 있겠지요? 그분이 말씀 안 하실 때는 어쩔 수 없겠지만 그분이 말씀하시는데도 내가 못 알아 듣는다면 문제가 있겠지요? 그분은 옛적에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셨대요.(히브 1,1) 그런데 이젠 당신 아드님을 통해서 주로 말씀하신다네요. 제 말이 아니라 히브리서의 저자가 하는 말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2) 그러니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면 복음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이유이겠지요. 물론 읽고 묵상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 주님 세례 축일 / 오상선 신부님 ~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마르 1,9) 예수님은 정말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의식하였을까요? 의식했다면 언제부터였을까요? 이미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원래부터 하느님이신데 무슨 소리냐고 하겠지만, 순수하게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그는 우리처럼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갖고 살았겠지요. 분명한 것은 그가 요르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을 때 가장 강력한 하느님 체험을 하였다는 것이죠.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자기에게 내려오고 하느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루카 3,22)이라고 하심을 강력하게 느낀 것 같아요. 이 세례 때의 하느님 체험이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의식을 갖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아니었을까요? 벗..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 오상선 신부님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1요한 5,14) 여러분은 기도를 하면 잘 이루어집니까? 기도를 많이 하는데 하느님은 왜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걸까요? 그건 아마도 반드시 이루어질 거라는 확신이 부족하던가, 아직 때가 아니던가, 아니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에 따라 청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세 번째가 문제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그분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요한의 논리는 하나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을 통해서만 그분을 알 수 있고, 그분의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따라 살다보면 그분의 뜻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그분의 뜻을 알게 된 사람..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 / 오상선 신부님 ~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치유시켜 주신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복음에서 나병환자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 시대에 "가장 버림받은 이, 가장 가난한 이, 하늘의 벌을 받은 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가장 어려운 이,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이"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나병환자 치유기사는 예수님의 메시아性을 잘 표현해 주는 이야기인 셈입니다. 우선, 나병환자의 입장에서 오늘 복음을 묵상해 봅니다. 나병환자는 정말 그 누구보다도 겸손하고 절실하게 깨끗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청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확고히 믿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 오상선 신부님 ~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1요한 5,3)이고, "그분의 계명은 자기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1요한 4,21)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 자기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은 어렵거나 버겁지 않습니다.(1요한 5,3) 왜냐하면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고,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5,4) 요한 사도는 계속해서 자신의 "사랑학 개론"을 전해줍니다. 결국 사랑입니다. 기승전'애'(起承轉愛)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도 사랑이고, 우리의 믿음도 사랑이며 사랑은 모든 것을 이겨낸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래서 우리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