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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레오나르도) O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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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 제 4주간 수요일 - 관상에 매번 실패한다면 / 김찬선 신부님 ~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주님의 이 말씀을 바탕으로 우리는 이렇게 단언해도 좋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보면 모든 것을 보며 하느님도 볼 수 있다. 이것이 관상이고 관상적 차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관상한다고 하면 하느님 관상만 생각합니다. 사람을 보는 것은 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상을 이렇게 이해한 사람은 하느님을 관상하기 위해 인간을 자기 시야에서 어떻게 해서든 몰아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저희 프란치스칸에게 이런 관상은 진정한 관상이 아니고, 그래서 이렇게 관상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진정한 관상은 하느님과 인간과 피조물을 모두 보는 것이고, 인간..
~ 부활 제 4주간 화요일 -문을 넓혀야 / 김찬선 신부님 ~ 뜬금없는 얘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저는 유대교 신자가 결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구약성서가 훌륭하고 그 성서가 얘기하는 하느님이 저의 신관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해도 유대교 신자는 되지 않겠습니다. 이 말은 유대인이 되지 않겠다는 뜻도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는 뜻입니다. 극단적인 선민사상과 시오니즘의 유대인과 유대교는 글러 먹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뽑으신 것은 이사야서가 얘기하듯 모든 민족을 당신께 모아들이기 위해서인데 잘못된 선민사상과 시오니즘의 유대인들은 자기들만 하느님의 백성이고, 다른 족속은 하느님 백성이 아니기에 그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것이 드러난 것이 어제 사도행전의 얘기입니다. 베드로가 할례받지 않은 이들과 식사를 한 것을 두..
~ 부활 제 4주간 월요일 - 이름을 불러 / 김찬선 신부님 ~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요한복음은 한 장 전체가 한 주제를 다루곤 합니다. 그래서 지난주 6장에서는 빵을 주제로 생명의 빵이 주제였고, 이번 주는 10장으로서 목자와 양들의 관계가 주제입니다. 오늘 복음은 먼저 목자는 어떤 존재인지 얘기합니다. 목자는 한편으로는 양들을 우리 안에서 안전하게 지켜주는 존재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밖으로 불러내어 풀을 뜯어 먹게 하는 존재입니다. 그리하여 목자가 있는 한 양들은 안전하고 배불리 먹을 수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지어주고 불러주는 존재입니다. 이름을 지어줌으..
~ 부활 제 3주간 토요일 - 영의 선택 / 김찬선 신부님 ~ 우리는 한 주간 내내 영원한 생명을 주는 주님의 몸과 피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 말은 참으로 내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넘어 듣기에 거북한 말씀을 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당신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한다고 그래서 주신다고. 이에 사람들은 급기야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사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말이 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과 듣기에 거북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말은, 내가 이해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기에 그래도 이해하려고 애쓰며 주님 곁에 머물러 있으려 했지만 듣기에 너무 거북한 말은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다며 마침내 떠나버립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
~ 부활 제 3주간 금요일 - 은총주의자 / 김찬선 신부님 ~ 저는 가끔 언론의 허풍스러운 표현들에 불쾌할 때가 꽤 있습니다. 왜냐면 ‘세기적인 결혼’이니 ‘세기적인 사건’이니 하는데 별것 아닌 것에 엄청난 의미를 갖다 붙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울의 전도(轉倒)야말로 이런 표현이 어울리고, 그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해야 마땅한 사건일 겁니다. 세기적 사건 정도를 넘어 ‘전 세기적 사건’ 또는 ‘인류사적 사건’이라고. 그러나 제 생각에 이 표현도 부족합니다. 아니 부족하다기보다 적당하지 않습니다. 사울의 전도, 이 사건은 사울에게 일어난 사건 정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일으키신 사건이고 구세사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불교적으로 바꿔 얘기하면 돈오(頓悟)라고 할 것입니다. 이는 점수(漸修)와 비교되는 것으로서 점수가 지속적인 수행을 통해 점진적으로 깨달음에 도..
~ 부활 제 3주간 목요일 - 갈림길에서 / 김찬선 신부님 ~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주님께서 끝날까지 애쓰신다는 나눔을 어제 했는데 그 나눔을 하고 어제 내내 그리고 오늘 새벽에 일어나서 이런 반성을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으로 이끄시려 이렇게 애쓰시는데 나는 무슨 노력을 하고 있는가? 이런 반성을 하다 보니 이런 거창한 질문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오늘 강의하러 정동에 가고, 내일 회의하러 지방에 가고, 모레 월례회를 하러 가고, 이렇게 매일 여기저기를 가는데 나는 진정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가다 보면 갈 데까지 갈 것이고, 갈 때까지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갈 것입니다. 그런데 갈 데까지 가고, 갈 때까지 갔는데 그곳이 엉뚱한 곳이고 낯선 곳이면 어떻게 될까요? 물론 그럴 리 없습니다. 저는 지금 머리로..
~ 부활 제 3주간 수요일 - 끝까지 믿을 때까지 / 김찬선 신부님 ~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주님께서 우리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는 것이랍니다. 그리고 이어 하시는 말씀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도 하십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 하느님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마지막이 좋아야 하고, 이런 마지막을 우리가 좋아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아니, 저에게는 이중 감정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좋으나 마지막은 싫은, 천국은 좋으나 이 세상에서 이별은 싫은. 이는 마치 제주도에 가고 싶다면서 집은 떠나고 싶지 않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 경우 결국 선택해야 하는데 이 선택은 그렇게 어렵지 않지요.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리..
~ 부활 제 3주간 월요일 -의식 성찰 / 김찬선 신부님 ~ “너희가 날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표징을 보지 못하고 빵을 보는 사람들에 대해 주님께서 나무라십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도 그런 사람이 아닌가 성찰함이 마땅합니다. 나는 빵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인 것처럼, 나는 표징을 보는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고 성찰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이 말씀을 내게 하셨음에도 내게 하신 것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렇다면 진정 나는 표징은 보지 않고 빵만 보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바 있듯이 저는 표징을 보는 사람입니다. 요즘 저는 일상에서 작은 기적을 많이 보고, 또 빵에서 표징을 ..